인터뷰가 끝난 후 내게 각인된 이준기는 자신을 직시하는 데 두려움 없는 남자라는 거다.

과거와 현재의 비교든, 언제나 어렵기만 한 시청률이든, 옛날 작품 속 자신의 미숙한 모습이든, 그는 아쉬워할지언정 피하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천운 같은 영광을 누려본 사람만이 체득할 수 있는 자신감, 그 환희의 시간을 지났다는 아쉬움,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보여주고 말겠다는 패기가 치열하게 충돌하고, 그 흔적이 지금 이준기의 얼굴을 만들고 있다.

배우는 자신의 얼굴에 길을 내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몇 년 사이 이준기의 얼굴은 꽤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게다가 절묘하게도 그의 성향과 행보는 다른 한 남자의 그것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살아내는 듯'한 격량의 시대, 개화기에 칼(전통이나 자존심)을 버리고 총(신세계이자 용기)을 쥐어야 했던 남자.
  
역사책을 통해 만났던 당시의 민중들과 1백 년이 지난 지금 어수선한 시국을 마주하며 마음 둘 데 없는 소시민들 모두에게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조선총잡이> 박윤강 말이다.

"지난해 <투윅스> 후 차기작이 로맨스나 멜로였으면 했던 것도 사실이예요. 매번 뛰고 구르고 쫓기고 고생하고 응어리져 있는 역할을 하다 보니 30대 남자의 자연스러운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도 욕심이 났어요. 스트레스까지 받아가며 작품을 찾던 중 <조선총잡이>를 만났죠. 너무 새로운 옷에 집착하는 제가 배우로서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대중에게 보이지는 모습에 연연하는 게 아닌가 싶어 스스로 실망하던 차였거든요. 모두들 히어로물 하면 이준기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유가 있을 테고, 한 장르로 누군가에게 인정 받는다는 것도 역시 의미가 클 텐데 말이죠. 특히 <조선총잡이>라면 새로운 히어로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갔어요."

'플랜비'없이 이준기만을 두고 쓰인 대본은 수개월 동안 그의 선택을 기다렸고, 그 신뢰에 마음을 열어젖힌 이준기는 기꺼이 합류했다.

그를 직접 만나보면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히어로로서 적격'이라는 제작진의 믿음에 공감을 표할 만한 몇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사극에 잘 어울리는 외모와 목소리(꽤나 남자답다), 왠만한 액션은 다 경험했다는 것(몸을 사리지 않는다), '양날의 검'같은 느낌(비극과 희극의 느낌을 모두 가졌다)까지.

생각해보면 <왕의 남자>를 제외하고는 반항아 고등학생으로 분한 <플라이 대디>, 드라마 폐인을 양산한 웰메이드 누아르 <개와 늑대의 시간>, 전설의 히어로 이야기 <일지매>, 현대 사회에서의 히어로 이야기 <히어로>, 절대 악에 맞서는 한남자의 이야기 <투윅스> 등 대부분 어떤 시대든 필요했고, 꿈꾸었고, 어쩌면 존재했을지 모를 영웅들 이야기였다.

혼란과 실패의 무게를 짊어지고 끝도 없이 언덕을 오르는 시지프스 같든, 혹은 엿 같은 세상에 '맞짱'뜨는 젊은이의 모습이든.

어쨌든 이준기는 현재 최상의 컨디션으로 6월말 첫 방송을 앞둔 드라마 촬영에 임하고 있다.

"몇 달 동안 집에 혼자 있다시피 하다가 스태프 형들, 누나들, 친구, 동생 다 있는 어마어마한 현장에 들어와 있으면 너무 든든하고 행복해요. 일분 일초도 쉴 틈이 없죠. 함께 어울리면서 새로운 것도 듣고 배우고 되고. 작품 끝나면 스트레스나 부담감만 한 공허함이 찾아오지만, 새 작품을 시작한 이 순간은 진심으로 설레요."

지난 2007년 <개와 늑대의 시간>이후 남상미와 재회했다는 사실도 긴 레이스를 앞둔 이준기에게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된다.

"새로운 배우들, 특히 여배우와 손발 맞추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요. 그런데 상미는 워낙 친하니까. 그런 시간을 온전히 작품을 위해서만 쓸 수 있어요. 둘이 투닥거리는 신을 찍을 땐 특히나 재미있죠."

그때 풋풋한 20대였던 이들은 어느덧 30대가 되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가 잘 견뎌냈구나, 싶어요. 여전히 젊은 피로서 큰 작품의 주연으로 만난 건 자기관리를 잘했고, 미움 받지 않았다는 증거니까요."

<개와 늑대의 시간>을 '가능성'으로 기억한다. 브라운관에서 목격한 누아르의 가능성, 그리고 <왕의 남자>이후 계속 부표하는 것만 같았던 이준기가 다시 증명한 가능성. 돌이켜보면 '이준기 신드롬'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이건 상전벽해 식의 스타 탄생 스토리가 아니다. 이준기는 수많은 사회, 문화적 담론의 화두였다.

'예쁜 남자'에 대하 팬심은 '크로스 섹슈얼'이라는 트렌드로 이어졌고, 각종 매체에서는 변화한 남성성에 대한 텍스트를 쏟아냈다.

또한 '남자가 예뻐도 좋다'는 사실을 확인한 패션, 뷰티 업계는 이를 산업으로 확장시켰다. 이준기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였죠.(웃음) 너무 놀라웠어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크로스 섹슈얼이 뭔지도 모른 채 제가 여자 화장품 광고까지 찍었으니까요."

당시 부모님의 극심했던 반대야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지인들도 배우의 꿈을 꾸는 그에게 "그 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충고하곤 했다.

"불확실했죠. 전형적인 미남형도 아니고, 좀 애매해요. <왕의 남자>니까 됐지. 그런데 사실 이준익 감독님도 저보고 너 참 이상하게 생겼다 하셨어요. 감우성 선배님도 엄청 반대하시고, 정진영 선배님만 쟤 뭐 있는데? 하셨대요. 감독님이 넌 외모는 탈락이지만 그 끼 때문에 뽑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는 특명을 내리셨죠. 오늘부터 모두들 얘를 어떻게든 이쁘게 보이게 하는 방법을 연구해.(웃음)"

나는 공길이 그 기다란 눈매 때문에만 성공적인 캐릭터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인 이준기'의 연기력과 존재감은 베테랑들 사이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너무 정점에서 시작한 탓도 있겠지만, 그가 이렇다 할 또 다른 정점에 다다르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유독 안타까웠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진 않을까?

"가끔 생각은 해봤어요. 배우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어야 하는데, 그 위치에서만, 인기에만 도취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솔직히 연기만 보자면 그때 칭찬 받은 만큼은 못할 것 같아요. 저도 변했으니까. 하지말았어야 했던 것들은 쏙쏙 떠오르네요.(웃음) 추억팔이 하자는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커요. 하지만 여전히 제게는 기회가 있으니까요. 이런 마음을 원동력으로 삼아서 해보려고요.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배우의 진정성을 갖고 계속 그 길을 파는 거. 조바심 내지 말고, 부지런히. '그냥 이준기를 인정해주세요'보다는 '제가 한 작품이니까 인정해 주세요'죠. 아마 그 작품이 인정 받는 날, 저의 새로운 모습도 인정 받을 수 있으리라 믿어요."

확실이 이준기의 행보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먼저, 그는 한류스타를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나와 가족적인 분위기로 유명한 나무 액터스의 식구가 되었다.

 

"배우로서 좀 더 발전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한류를 타야 하는데, 한류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회사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좀 더 윈윈하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또한 몇 년 저 SNS에 '소처럼 일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인사말과 함께 도발적 사회 발언을 서슴치 않았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대에 직설적으로 발언하는 것도 좋지만 지켜봐줄 줄도 알아야 했는데, 그게 오히려 더 위로가 될 수도 있는데.... 생각해 보면 저는 이준기를 이렇게 봐주길 원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좀 부끄럽죠."

그리고도 이준기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빨리 어른스러워지지 않아야 것을 알고, 꽁꽁 닫고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며, 앵무새가 되는 것보다 오히려 수다 떠는 인터뷰가 더 유익하다는 것도 안다. 이미 인터뷰를 시작한 지 한시간 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준기와의 인터뷰 중 유독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다. 대중(팬, 시청자, 관객 등) 그리고 책임감.

"주연 자리는 누군가가 간절하게 꿈꾸고 있을지도 모를 소중한 기회잖아요. 그래서 전 현장에서 어떻게 하면 능동적으로 놀 수 있을지 늘 고민해요. 대중, 제작진, 그리고 제가 어떻게 소통하고 공유할까? 제겐 그게 책임감이예요."

세 시간 내내 뻘뻘 땀 흘리며 노래하고 춤추는,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그의 팬미팅(이번에는 세월호 참사로 취소되었지만)도 책임감의 일환이다.

"팬미팅은 그냥 사랑합니다, 가 아니라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자리, 서로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 자리예요. 이 배우를 좋아하고 지지하며 함께 나이 들어간다게 행복하도록,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치 있게 만들고 싶어요."

문득 이준기의 달라진 얼굴을 다시 봤다. 책임감이 이렇게 달콤한 단어가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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